인천상륙작전의 모티브인 Xray 작전

 

주 :  (1) 이 Xray 작전은 필자가 해군에 입대한 직후 있었던 작전으로 휴전이 성립된 후 "인천상륙작전"에 직접 참전하였던 입대 동기생들로부터 들은 많은 내용과, 인터넷에서 수집한 여러 자료들을 참고하였고, 또 2016년 7월에 개봉된 영화 "인천상륙작전"에서 영화화 한 내용도 참고 하여 이 글을 작성한 것입니다.

(2) 영화 "인천상륙작전"을 시청해 보면 약 3분의 2 정도의 내용이 Xray 작전에 치중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3) 혹시 아직까지 영화 "인천상륙작전"을 관람하지 못하신 분은 아래 영화 보가영화 주소를 클릭하면 시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필자가 기록한 아래 내용들을 먼저 읽은 후에 영화를 감상하면 더욱 내용을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영화 "인천상륙작전" 

Image result for f영화 "인천상륙작전 image


 

[영화 보기 #1]   [영화 보기 #2]

영화 주소 

#1: http://www.tudou.com/programs/view/html5embed.action?type=0&code=vEdQZAS4m08&lcode=&resourceId=0_06_05_99 


#2: https://openload.co/embed/k_aUyz0klsg/


#3: http://k-vid.com/embed.php?id=MTAwMjU0

 

감     독

제     작

각     본

출     연

제     작

촬영 기간

개봉 일자

상영 길이

: 이재한

: 양창훈

: 이만희

: 이정재, 이범수, 리암 니슨, 진세연, 정준호 등

: 태원 엔터테인먼트

: 2015년 12월 4일 - 2016년 3월 10일

: 2016년 7월 27일

: 2시간 16분

 

1. 북한의 남침으로 위기에 빠진 한국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 4시, 북한군은 242대의 탱크를 앞세우고 중장비로 무장한 7개 사단 규모의 막강한 병력으로 일제히 38선 전역에서 고요히 잠자고 있는 우리 나라를 향하여 기습 남침을 가해왔다. 칼빈 소총과 M1 소총으로 경무장 하고 있던 우리 국군은 막강한 북한군의 공세를 당해내지 못하고 밀리고 밀려, 3일만인 6월 28일에는 수도 서울을 북한군에게 내어 주었고, 계속 남으로 밀려 전쟁이 시작되고 1개월이 조금 지난 8월 초순에는 경남 일부 지역만을 남겨 둔 전 국토를, 북한군에게 유린 당하는 어려운 처지에 빠지게 되었다. 이 때 UN 총회는 위기에 처한 한국을 구하기 위해, UN의 깃발 아래 모인 16개국에서 파견한 병력을 한국으로 보내왔다. UN은 맥아더 장군(Douglas MacArthur)을 UN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UN군을 통솔토록 했다. 맥아더 장군은 성공 확률 5000분의 1이라는 지극히 어려운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하여 시행 함으로써 위기에 처해 있던 한국을 구해냈다.

   

2. 인천상륙작전 시행 계획에 대한 극렬한 반대

UN군 총사령관에 임명된 맥아더 장군은 패색이 짙던 전쟁 판세를 뒤엎기 위해서는 어떤 작전을 수행해야 할 것인가를 구상하게 되었다. 전략적 요충지인 인천상륙작전을 시행하면 북한군의 허리를 끊게 됨으로, 북한군은 보급로가 차단되어, 낙동강 전선에서 기세 등등하던 북한군의 전투력이 크게 떨어짐으로써, 수세에 몰려 있던 아군이 반격하기에 유리하다는 장점이 있으나, 상륙작전 시행에 큰 어려움이 있다는 것도 염려하게 되었다. 그래서 비교적 상륙 조건이 좋은 군산 해안, 평택군 포승면 해안 등 여러 곳을 검토해 보았으나, 모든 지역이 비록 상륙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적의 보급로 차단이 쉽지 않기 때문에, 인천상륙작전과 같은 큰 효과를 얻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인천상륙작전을 시행키로 마음을 굳혔다.

    

       퍼온 글 "다리 절단된 77세의 영웅"   (쓰신 분 : 박란희 기자)

 

필자 주 : 이 내용은 영화 "인천상륙작전" 영상이 약 31분 29초 정도 진행되었을 때부터 약 1분 30초 동안 맥아더 장군이 언급하기를 "내가 서울에 가보니 후퇴하지 않고 홀로 나라를 지키는 한국 소년병을 만났다"는 언급이 나온다. 바로 그 때 맥아더 장군을 만났던 소년병을 박란희 기자가 찾아가서 만나 인터뷰한 내용이다

 

201608032728533.jpg

        학도병으로 6·25 전쟁에 참전, 한강 방어선에서 맥아더 장군을 만난 병사인 신동수옹

 

"병사! 다른 부대는 다 후퇴했는데, 자네는 왜 여기를 지키고 있나?”, “저는 군인입니다. 상관의 명령 없이는 절대 후퇴하지 않는 게 군인입니다. 철수 명령이 있기 전까지 죽어도 여기서 죽고, 살아도 여기서 살 겁니다”.

1950년 6월 29일, 당시 스무 살의 한 일등병은 서울 영등포에 있던 진지(陣地)에서 맥아더 미 극동군사령관과 이런 대화를 나눴다. 전쟁이 터진 지 나흘째, 이미 한강 이북은 인민군에 의해 점령된 상태였다. 그곳은 남한의 부대가 마지막까지 버티던 한강방어선이었고 맥아더 장군은 도쿄에서 날아와 상황을 돌아보던 참이었다. 

“정말 훌륭한 군인이다. 내가 일본으로 건너가면 즉시 지원군을 보내주겠다. ”이 군인에게 감동 받은 맥아더 장군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이렇게 말했다. 약속대로 곧바로 한국전 참전은 실행에 옮겨졌다. 

국방부 군사 편찬연구소 관계자는 “맥아더 장군이 당시 한국군 병사의 말에 감동을 받아 참전을 결심했다는 사실은 참전 장성 회고록 등 여러 문서에서 확인된다”고 말했다.

 

수십 년째 묻혀져 있던 이 일등병의 존재가 최근 밝혀졌다. 신동수(2008년 현재 辛東秀·77)옹이다. 그를 찾아 충청북도 충주시 앙성면으로 향했다.

 

“이렇게 멀리 오게 해서 어쩌나. 다리가 이래서….” 그는 왼쪽다리를 절었다. 양말에 가려졌지만, 한눈에도 의족(義足)임을 알 수 있었다. 기쁨인지, 고통인지 모를 옛 전투 이야기를 시작하자, 신옹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낮아졌다 했다.

그가 속한 부대는 백골부대 18연대 1대대 3중대였다. 6월29일 이들은 영등포구 양화동의 인공폭포공원 인근에 진지를 편성해놓고 있었다. 다른 대대는 물론 같은 대대 다른 중대도 후퇴해버린 외로운 싸움이었다. 사흘째 굶고 있던 그때였다. 

“4명이 지프에서 내리더라고. 처음에는 소련군인줄 알고 쏘아 죽이려고 쫓아나갔어요. 하지만 정모 마크가 소련군 것과 다르더라고. 사령관이라고 했어요.” 

하지만 그때만 해도 그가 누구인지 전혀 몰랐다고 한다. 대화가 끝난 후 맥아더 장군은 그에게 연막탄 2개와 대공표지판을 선물로 줬다. 그리곤 곧 그를 잊어버렸다고 한다. 노량진과 영등포까지 진격한 인민군의 총포가 시시각각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 “우리 머릿속에는 오로지 적을 무찌르고,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뿐이었어요.” 

 

맥아더 장군이 돌아간 이후에도 그는 사흘을 더 버텼다. 

“결국 후퇴 명령을 받았습니다. 중대원들에게 명령을 전달하며 미친 듯이 돌아다니고 있었죠. 갑자기 다리가 오그라들더니 펴지질 않더라고요. 그러고도 150m를 뛰었어요. 살기 위해 아무 집이나 찾아가 부뚜막 아궁이에 숨었는데, 착한 주인이 온몸을 닦아주고 빨간 헝겊을 찢어서 인민군 치료소에 데리고 가주더군요.” 

하지만 3개월이 지나도록 총탄에 맞은 다리를 치료 받지 못했다. 무릎에선 구더기까지 나왔다. 결국 다리를 절단했다. 다리를 절며 절며 찾아간 강원도 춘천. 하지만 남동생은 형을 찾으러 가겠다며 인민군에 합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못 만난 세월이 무려 56년이 됐다. 

당시 100여 명 중 살아남은 사람은 7명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7일 동안의 처절한 혈전 덕분에 인민군의 서울 함락은 늦어졌고, 지연전을 위한 재편성, 유엔군의 조기 전선투입이 이뤄졌다고 한다. 그의 잘린 다리가 나라를 구한 것이다. “6월 25일만 가까워오면 내가 묻어준 동료들, 내 앞에서 죽어간 동료들이 떠올라요. 군번도 없이 죽어간 전우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어떻게 지킨 나라인데…. 지금 우리 젊은이들이 그걸 알고 있나요?” 그의 목소리에 안타까움이 배어 있었다. (충주=박란희 기자의 글)

          

3. 인천상륙작전 계획의 실행 승인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실행 하겠다고  하자, 많은 군사 전문가들은 인천 지역은 수로 자체가 좁고, 조수간만의 차이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수만 명을 태운 많은 함정들이 어떻게 짧은 시간 안에 상륙 병력을 내려주고 물이 빠지기 전에 빠져 나올 수 있느냐?. 그러므로 성공 확률 "5000분의 1"인 이 작전은 묘수가 없는 한 성공할 수 없다면서 극렬하게 반대했다. 그렇지만 맥아더 장군은 그 고집을 꺾지 않고 “적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므로 이 작전의 성공을 확신한다”라는 주장을 피력하면서, 도쿄(東京) 회의에서 무려 45분간이나 되는 연설로 반대하는 이들을 설득했다. 그러자  작전명 크로마이트(Operation Chromite)라는 인천상륙작전의 실행 승인을 얻게 되었다.  

 

4. 상륙작전 성공을 위한 기만작전과 첩보작전 계획

맥아더 장군도 인천상륙작전은 "성공 확률 5000분의 1의 도박"이라고 표현 하였으니, 불가능해 보이는 작전을 성공 시키기 위해서는, 대대적인 기만작전의 시행과 첩보 수집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적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거짓 정보를 흘리면서 군산 해변에 상륙해 수색을 실시하기도 하였고, 또 진남포, 삼척, 원산 등 여러 해안에 상륙작전을 전제한 공격처럼 위장 사격을 가하는 등 여러 방법의 기만작전을 수행하다가, 장사상륙작전을 실행하여 적의 이목을 동해로 돌리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여러 방면에서 펼친 기만작전으로 북한군은 끝내 UN군이 인천으로 상륙할 것이라곤 알아채지 못하도록 적을 교란 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어려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케 한 배후에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생명을 버릴 각오로 적지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서 묵묵히 싸운 영웅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2016년 9월 인천상륙작전 66주년을 즈음하여 그 배후에는 장사상륙작전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미 밝힌 바 있다. 

 

오늘은 지난번에 언급하지 아니한  Xray 작전을 소개 하려고 한다. 장사상륙작전은 인천상륙작전의 반대편인 동해안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해안으로 군번도 없는 어린 학도병들을 상륙케 하여, 북한군의 이목을 동해 쪽으로 쏠리게 하는 기만작전인데 반하여,  Xray 작전은 주된 인천상륙작전을 수행하는 서해쪽에서 작전 수행에 절대 필요한 정보들을 수집하여 완벽하게 대비함과 동시, 장애 되는 요인들을 사전 제거하기 위한 작전이다. 그리고 캘로(KLO)부대(Korean Liaison Office)원들을 상륙작전 시행 직전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는 팔미도 지역으로 침투 시켜 북한군이 전령한 후 까버린 등대 불을 살림으로, 작전을 위해 투입되는 UN군 함정들이 등대 불을 보고, 좁은 수로를 안전하게 들러갈 수 있도록 유도하는 작전도 사전에 시행된 작전이었다.

 

이와 같은 작전들을 선행한 까닭에, 성공 확률 5000 분의 1 임으로 시행하기 어렵다는 인천상륙작전을 1950년 9월 15일 시행하여 북한군의 허를 찌르면서 성공 시켰던 것이다.

 

5. 작전 수행에 절대 필요한 정보

어떤 작전을 성공 시키려면 엄청난 사전 정보가 필요하다. 과학 문명이 발달한 오늘 날과 같은 전쟁에서는 항공 사진이나 인공 위성을 이용한 전자 장비를 이용하여 정보를 수집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당시 사정으로는 사람이 직접 가서 보고 듣고 확인해야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시대였다. 그렇기에 인천상륙작전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Xray 작전은 사람이 직접 적지로 들어가서 정보를 수집한 첩보작전이었다. 이와 같은 숨은 작전이 있었기에 맥아더 장군은 7만 5천 여 명의 UN군 병력을 이끌고, 병력의 큰 손실도 없이 인천 지역에 있는 북한 군을 진멸한 후 인천상륙작전을 성공 시켰고, 연 이어 빼앗겼던 서울을 탈환한 다음, 38선을 돌파하여 평안도와 함경도까지 북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6. 한국 해군이 담당한 Xray 작전

 미 극동군사령부에서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미 첩보대원의 투입을 고려하였으나, 언어 소통의 문제와 지형에 밝지 못한 점, 그리고 피부색이 다름으로 인한 여러 문제들을 감안하여 한국군이 담당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래서 1950년 8월 12일 미 극동군사령부에서는 우리 해군 손원일 총참모장에게 작전을 위한 정보수집을 요청해 왔다. 손원일 총참모장은 이 사실을 곧 바로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하니, 대통령은 “놀랍고 반가운 소식”이라면서, 정보를 잘 수집해서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반드시 성공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라고 지시했다. 대통령의 재가를 받은 손원일 총참모장은 1950년 8월 13일 정보국장인 함명수 소령(제7대-1964-1966 해군참모총장 역임)을 은밀하게 불러 정보수집을 위한 작전을 지시하게 되었으니, 인천상륙작전( 9월 15일) 시행되기 꼭 한 달 전이었다.

 

주 : 당시(1950년)에는 "참모총장"이라고 하지 않고 "총참모장"이라고 했으며, 그 계급은 "준장"급 장성으로 보하였었다.

 

해군 정보국장인 함명수 소령은 비밀을 유지하면서, 자신이 직접 첩보대를 지휘하기로 결정하고서는 해군 정보국에서 특수 공작 임무를 수행하던 정보 장교 김순기 중위와 임병래 소위, 장정택 소위를 각조의 조장으로, 그리고 해군정보국 소속 김남규, 정성원, 박원풍, 차성환, 한유만, 홍시욱 대원과 또 다른 소속 병사 약간명과 군무원 7명을 부대원으로 구성한 총 17명으로 첩보대를 편성하였다. 

 

7. 작전 수행을 위해 부산 출발

첩보대 조직과 출동 준비가 끝난 1950년 8월 16일 함명수 소령은 손원일 총참모장에게 보고하고, 8월 18일 오전 1시 철제 어선을 타고 부산항을 떠났다. 극비로 수행해야 하는 임무인 만큼 대원들은 가족에게도 알리지 못하였고 또 만약의 경우 적지에서 적에게 잡혀 전사 당하게 될 경우를 대비하여 각자의 머리카락과 손톱, 발톱을 깎아 사물함에 남겨둔 채 떠나게 되었다. 당시 장정택 소위는 약혼녀에게 출발 사실을 알리지 않고 떠난 관계로 파혼을 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8. 첩보대원의 임무 부여 

부산을 출항한 지 6일째 되던 날 영흥도 근해에 이르렀을 때, 함명수 소령은 비로서 입을 열고 대원들에게 출동 목적과 임무를 알려주었는데, 그 임무는 인천지역에 있는 북한군 배치 현황을 비롯하여, 보급선과 보급 현황, 해로에 부설된 기뢰 상황의 파악, 상륙 지점의 지형 상태, 인천항의 안벽 높이, 밀물과 썰물 때의 해안의 길이, 북한군의 방어진지 상황 등을 파악하라는 중대한 임무였다. 

 

9. 해군이 출동하여 덕적도와 영흥도 탈환

당시 우리 나라 지상 군은 북한군에 밀려 낙동강까지 후퇴 하였을 때임으로, 인천과 영흥만 일대의 도서들은 모두 북한군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이 때 북한군은 부산을 함락 시켜야 한다는 큰 목적을 기필코 이루겠다는 생각으로 총력을 그곳에 집중하고 있었던 관계로, 그들이 이미 점령한 지역에 대하여는 신경 쓰지 않고 있다는 것을 우리 해군은 판단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우리 해군은 영흥만 일대에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는 여러 섬들을 탈환해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기할 수 있고, 또 안전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을 판단하게 되어, 그 전초전을 펼치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1950년 8월16일 해군 총참모장 손원일 준장은 PC 702함(금강산호=함장 이희정 중령)에게 예속 함정 7척을 지휘하여 영흥만 일대 섬들을 적으로부터 탈환하라는 명령을 내림으로 해군 함정 8척은 현지로 이동했다.

 

Image result for PC 702함 (금강산호)

                                         우리 해군 두 번째 전투함 PC 702함(금강산호)

  

기함인 702함의 함장은 먼저 적정을 확인하기 위해, 예속 함정 중 YMS 513정장에게 "513정은 문갑도(덕적도 인근에 있는 섬)로 기습 상륙하여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513정은 명령에 따라 큰 저항 없이 문갑도에 기습 공격을 가하면서 상륙하여 섬에 있던 인민위원회 간부들을 모두 생포 하였다. 이로써 덕적도를 위시한 근처 섬들의 적정이 크지 않다는 것을 판단하게 되었다. 그래서 8월 17일, 8척의 함정 장병 중에서 111명을 선발하여, 육전대를 편성하고서는, 702함 항해장 장근섭 중위를 중대장으로, 3개 소대의 소대장으로는 오윤경, 서영일, 이건호 소위를 각각 임명하고, 각 소대에는 30여 명씩의 전투원을 각기 배치했다. 그러나 이들 육전대는 복장, 장비, 무기, 작전용 지도, 무전기 등 제대로 갖춘 것은 없는 상태로 덕적도 탈환 작전에 돌입하였으니, 죽음을 각오한 상륙전이었다.

 

8월 18일 새벽 4시 상륙정에 올라탄 육전대는 영국 경순양함과 캐나다 구축함, 우리 해군 여러 함정에서 엄호하는 함포 사격의 지원을 받으면서, 새벽 6시쯤 덕적도 해안에 접근한 후, 가슴까지 차는 바닷물을 헤치며 상륙했으나, 의외로 적의 저항이 전혀 없었다. 그야 말로 무혈 상륙에 성공한 것이다. 덕적도에 상륙한 육전대는 8월 19일까지 적 사살 26명·생포 7명 외에 소총 7정과 무전기 4대를 노획했다. 그렇게 되자 적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Image result for 영흥도 덕적도 위치도

                                                    덕적도와 영흥도의 위치도

 

이제 그들의 다음 탈환할 섬은 영흥도였다. 영흥도는 약 15마일 거리에서 인천시가를 바라다 볼 수 있고, 또 인천항을 출입하는 수로의 요지가 되는 섬으로써, 지형은 비교적 평탄하고 섬의 길이는 약 6㎞ 가량 된다. 덕적도의 전투 성공을 본 까닭인지 캐나다 구축함으로부터 자동소총 20정과 실탄 500발, 수류탄 1상자를 지원 받아 무장을 갖춘 상태로, 1950년 8월 20일 새벽 5시, 상륙정에 올라타고 영흥도로 향했다. 1차 목표인 내리 해안에 이르자 무릎까지 빠지는 개펄을 헤치고 상륙한 후, 오전 11시45분 내리를 완전 점령한 후, 이곳에 중대본부를 설치하고 잔당 소탕작전을 펼쳤다. 어성리를 향해 진격하던 제1소대가 매복하고 있던 적과 교전이 벌어졌다. 적 5명을 사살하면서 우리 해군 2명도 전사하는 아픔을 맛보았다. 이 때 남은 적들이 인천을 향해 탈출할 목적으로 동쪽 해안의 산에 은신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기에,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추격전을 전개 하였으나, 일부 적은 바다로 뛰어들어 도망갔고, 산과 민가에 은신하고 있던 적 15명을 생포하였다. 

 

그리고 8월 22일에는 702함의 임영호 소위와 정모 하사관은 영흥도 가까운 곳에 있는 알섬에 상륙하여 적 9명을 생포함으로써 8월 23일 아침 영흥도를 완전 장악하게 됨으로써, 안전한 치안 유지를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702 함장 이희정 중령은 8월 24일 오전 섬 상태를 확인한 후, 함정이 수행해야 할 새로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10여 명의 자치 치안요원에게 치안업무를 인계한 후, 육전을 위해 임시로 구성했던 육전대원들을 본래의 함정으로 각각 복귀 시켰다. 

   

10. 첩보대원의 정보 수집 시작

첩보대원들이 부산항을 출발할 당시 손원일 총참모장은 우리 해군이 덕적도를 장악하게 될 것임으로, 덕적도로 상륙하여 그 섬을 거점으로 정하고 작전을 수행하라고 명령 하였다. 그러나 첩보대원들이 영흥만에 이르기 3일 전인 1959년 8월 21일, 이미 우리 해군이 영흥도 탈환에 성공하였기 때문에, 함명수 소령은 손원일 총참모장에게 인천과 더 가까운 영흥도를 근거지로 삼겠다고 건의하여,  8월 24일 새벽 1시 영흥도 북쪽 해안 십리포로 상륙하였다. 인천 앞바다 영흥도에 거점을 정한 첩보대원들은 인천상륙작전의 모티브가 되는 Xray 작전이라는 중대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해군본부가 서울에 있을 당시, 정보 수집을 위하여 연락하던 민간인 조직원들을 찾아 모아 지하 조직을 구축하였고, 그들을 통해 인천 지역으로 왕래할 수 있는 통행증을 입수하였으니, 이에 협조한 민간인과 영흥도 주민들 모두가 목숨을 걸고 첩보 대원들을 적극 도왔던 것이다.

 

 인천 지역으로 왕래할 수 있는 통행증을 손에 넣음으로, 인천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사실상 열렸다. 그러니 정보 수집의 효율성을 고조하기 위해 첩보 수집대의 업무를 3개조로 분담하여 시행 하였는데, 장정택 소위는 통신정보 등에 관한 정보수집 및 분석을, 그리고 김순기 중위와 임병래 소위는 인천, 수원, 서울 등지에 잠입하여 작전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무엇 보다 시급한 것이 월미도에 대한 정보 수집이었다. 그 이유는 연합군의 함정이 인천항으로 안전하게 진입하기 위해서는 인천의 관문인 월미도에 대한 점령이 선행되어야 함으로, 이를 위해서는 월미도에 대한 지형과 북한군 정보 동향 파악이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첩보 부대원들은 각 조장 인솔 하에 월미도 해안도로 보수공사 인부로 가장하여 일하면서, 이곳에 구축해 놓은 인민군의 해안포대의 위치와 그 수를 파악하기 위해, 때로는 민간인 복장으로, 때로는 인민군 복장으로, 적 병력 탐지에 힘을 쏟았다. 이렇게 파악한 정보는 곧 바로 영흥도의 첩보부대 기지를 통하여 해군 본부를 거쳐 맥아더 사령부로 전달하였다.

 

Image result for 인천상륙작전 청색해안

                                        인천상륙작전 상륙 중심지였던 월미도의 위치도

 

주 : (1) 전쟁이 진행되고 있을 당시 우리 나라에서 첩보 업부를 담당하던 부대들

UDT(수중 폭파부대), SSU(해난 구조부대), UDU(해군 정보대), HID(육군 정보대), OSL(공군 정보대), MIU(해병 북파 특수공작대)로, 이들을 일컬어 북파 공작원이라고 칭 하였다. 이들을 쉽게 설명하면 대한민국에서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으로 비밀리에 파견한 비밀 공작원이었다. 이들은 각각 각 군 본부 정보국에 소속되었다.

(2) KLO (Korea Liaison Office) 부대란?, "주한 첩보 연락처" 혹은 "주 한국 연락반", "주한 연락처", "켈로 부대"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알려졌는데, 이들은 미국 극동군 사령부가 1949년 6월 1일 북한지역 출신자를 중심으로 조직한 북파 공작 첩보부대였다. 한국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많은 비밀작전을 수행하면서 많은 희생자들이 생겨났지만 부대 특성상 지금까지도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있는 비운의 부대라고 말하고 있다. 

 

11. 미 극동군사령부 KLO 대원 20명이 영흥도 도착 

1950년 9월 1일, 미 극동군사령부 정보국 소속 클라크 대위를 비롯한 장교 여러 명과, KLO 부대원 20여 명이 우리 해군이 장악하고 있는 영흥도로 왔다. 그리하여 우리 해군 첩보대가 수집한 모든 정보들이 그 전까지는 한국 해군본부를 통하여 미 극동군사령부로 전달 되었으나, 그 때부터는 영흥도에 상륙한 미 해군 클라크 대위를 통하여 바로 미 극동군사령부로 송신 되었으니, 맥아더 장군이 필요로 하는 인천상륙작전 수행에 필요한 정보들이 한결 빠르게 전달되었다.

 

12. 첩보부대에 철수 명령

인천상륙작전 2일 전인 1950년 9월 13일 맥아더 사령부에서는 인천상륙작전에 필요한 모든 정보들이 수집 되었음으로, 첩보부대에 대한 철수 명령이 하달되었다. 그 명령에 따라 많은 첩보대원들은 인천 근해에 대기하고 있던 해군함정으로 철수하고, 뒷정리를 위해 임병래 소위와 홍시욱 하사(2등병조) 등 일부 대원만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소수의 한국군이 영흥도에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북한군 1개 대대가, 9월 14일 영흥도로 공격을 가해 왔다. 그렇게 되자 임병래 소위와 홍시욱 하사는 적을 다른 곳으로 유도하면서 전투를 벌렸고, 그 사이 다른 첩보 부대원은 모두 대기하고 있던 함정편으로 탈출케 하였다. 임병래 소위와 홍시욱 하사는 북한군과 계속 맞서 싸웠으나 수적으로 열세인지라 적의 공격을 당해내지 못하게 되자, 드디어 인천상륙작전 하루를 앞둔 시기에 만약 자신들이 포로로 잡히면 정보가 누설되어 만사가 수포로 될 수 있다는 것을 염려한 나머지 "대한민국 만세"를 외신 다음 휴대하고 있던 총으로 자결하였다. 

 

2016년에 개봉된 인천상륙작전 영화는 Xray 작전을 극화하면서 해군 첩보부대가 인천상륙작전을 지원하려고 첩보 활동을 벌였다는 큰 줄거리만 따오고 구체적인 내용은 새롭게 구성 제작했다고 한다. 극적 긴장감을 높이려고 우리 첩보부대가 북한군으로 위장해 인천지역에 침투했다는 사실만을 강조 하고 첩보부대의 주된 타깃인 북한군의 기뢰매설 위치 정보 수집에 한정했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영화 제작사인 태원 엔터테인먼트 정태원 대표는 "실제 작전한 내용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영화이기는 하나, 영화적 재미도 중요하기 때문에 상상력을 동원하여 이런 방향으로 재구성했다"고 한다. 

 

영화에서 특수부대원의 리더로 활약한 장학수(배우 이정재)는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위하여 인천 지역에 잠입하여, 첩보수집을 성공적으로 펼치고 적에게 포위되어 자결한 해군 중위 임병래의 활동 내용을 극화 한 것이라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54년 이들에게 을지무공훈장을 추서 했으며, 미국은 1953년 7월 은성훈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해군에서는 그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유도탄 고속함 10번함(임병래함)과 11번함(홍시욱함)의 함명을 그들의 이름을 따서 부여했다.

 

영화를 제작할 때, Xray 작전 중에서 가장 슬픈 대목인 임병래 소위와 홍시욱 하사의 자결에 대하여는 영화 내용에 반영하지 못했다고 한다. 자결 내용을 넣자니 영화 이야기의 흐름을 크게 손봐야 함에 따른 부수되는 문제(상영 시간과 촬영 비용) 등이 뛰따르게 되고, 또 영화을 마친 이야기에 맞추려고 하니 자결 시점을 자의로 변경하는 것도 문제가 있기 때문에 반영하지 않는 방향으로 결정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영화 내용에서는 영흥도가 아닌 월미도에서 우리 첩보부대와 북한군과 벌어진 마지막 전투를 펼친 것으로 마무리 하고 있다.

  

             영화 "인천상륙작전" 캐릭터 예고편 보기

 

[보기1. 인천상륙작전' 캐릭터 예고편 (2분37초)

[보기2. 인천상륙작전' 티저 예고편 (0분58초)

[보기3. 인천상륙작전' 리암 니슨 내한 예고 영상 (1분 28초)

[보기4. 인천상륙작전' 메인 예고편 (1분 40초)

   

13. 등대 점화를 위한 KLO 부대의 활약

261척의 함정을 타고 인천 외항에 도착한 UN군 병력 75000명이 무사히 내항으로 들어가서 상륙작전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인천항만 전체를 볼 수 있는 팔미도 등대를 탈환하고 북한군이 고의로 끈 등대 불을 밝혀야만 병력을 실은 함정들이 좁은 항로를 거쳐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맥아더 사령관은 “1950년 9월 15일 0시를 기하여 팔미도 등대를 밝히라”는 명령을 KLO 부대에게 내렸던 것이다.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KLO 부대 한국인들과 미군으로 구성된 한미 연합 특공대는 팔미도를 수비하는 북한군과 격전을 벌렸지만 KLO 부대원 22명이 전사하고 말았다. 그러자 클라크 대위를 비롯한 미군 3명과 KLO 부대원 3명이 다시 출동하여 격전을 벌인 끝에 밤 10시, 등대를 탈환하였으나, 연료 탱크와 등불 받침을 연결하는 부품이 사라져 등댓불을 켤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실의에 빠진 대원들은 건전지의 전력이 바닥났기 때문에 어둠 속을 헤매면서 찾던 중, 기적적으로 없어진 부품 나사못을 발견하여, 1950년 9월 15일 자정이 막 지난 0시 12분 경, 팔미도 등대에 불을 밝힘으로 그 불빛을 본 맥아더 사령관은 UN군 함정에게 진격 명령을 내림으로, 바른 침로를 찾아 항만 안을 향해 들어가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이 시작하여 어렵다는 작전을 성공 시켰다.

  

1470559003.jpg

이 경로도에 나타난 바와 같이 인천상륙작전은 3개 해안으로 상륙하였다. 흔히 생각 하기를 단순히 한 곳 해안을 통하여 상륙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적색, 녹새, 청색해안 3곳의 해안으로 작전이 존개되었다. 팔미도 등대의 위치도 지도에서 알 수 있다. 팔미도 등대는 KLO 부대가 탈환하여 불을 밝힌 등대다.

  

KLO 부대원들은 승리의 빛이자 희망의 빛을 밝혔지만 정작 그들은 그늘에서 활동하다가 그늘에서 세상을 떠난 분들이 너무나 많다. 더구나 KLO 부대는 한국 전쟁이 휴전 되던 다음해 전격 해체되는 바람에 그들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그들은 위기에 빠진 국가를 위해 큰 공로를 수립하였기에 마땅히 국가 유공자로 선정되어야 하나, 그렇지 못한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그 이유는 전쟁이 격화되어 행정력이 마비되어 있을 때, 어떤 이는 전쟁 터에서 어떤 이는 기록도 남기지 않고, 더구나 미군 소속으로 군의 명령을 받고 참전하였기 때문에 신상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KLO 부대 출신자들의 자체 추산으론 3만 명에 이르는 분들 모두가 이북 출신이라고 한다. 그 중 6천명 정도는 전사 하였다고 하고, 많은 분들이 행방불명이 되어 생사를 알 수 없다고 한다. 현재 2천-3천명 정도의 생존자의 소재를 확인되었다고 하니 안타깝다. 몇 년 전부터 국가기록원에서 6 25 전쟁 자료 등을 수집하면서 보상의 길을 열어 놓았지만 정확하게 입증할 방도가 없는 상황 때문에, 그 분들의 공적도 확인할 수 없고, 역사적인 정확한 기록도 밝히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팔미도 등대에 관한 기록 역시 정확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등대의 불을 밝힌 사람이 누구였던 간에, 그들이 목숨을 걸고 조국을 위해 싸웠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필미도 등대 탈환을 위한 공격을 우리 해군 첩보부대와 KLO 부대의 합동 작전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실제적인 면에서는 두 부대가 합동 작전을 벌렸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많은 기록을 보면 한미 합동으로 작전하였다는 기록이 미 극동군 사령부 정보국 소속 부대원인 미국인들도 참여 하였고, KLO 부대원들도 참여 하였다고 하는데, 

그렇지만 1950년 9월 14일 KLO 부대가  팔미도를 탈환하여 그곳에 있던 등대를 밝힘으로 261척의 UN군 함정이 무사히 인천항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만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14. 결론 

국전쟁을 일으킨 북한의 김일성은 칠골장로교회 장로인 김형직(金亨稷)과 신앙의 가문에서 자라난 강반석(康盤石=베드로의 이름) 권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어린 시절 믿음 안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그가 스스로 말하기를 "유년시절 나도 송산리교회 신자였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김일성은 한 때 복음을 받았다가, 귀한 믿음을 버리고는 소련을 등에 업고 권력자가 된 다음부터, 하나님께 대항하는 자로 변신하여 기독교를 탄압하였고 많은 목회자들을 죽였으며 성도들에게 많은 핍박을 가하는 하나님께 대항하는 자로 변신한 자이다.

 

그와 같은 김일성이 1950년 6월 25일 한국을 삼키려고 38선 전역에서 기습 남침을 가하면서 한국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순식간에 대한민국은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이 절망적인 상태로 빠지고 말았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은혜를 내리시는 하나님이시기에, 불레셋 골리얏 장군에게 떨고 있는 이스라엘을 구하시기 위해, 소년 다윗을 들어 물맷돌과 지팡이로 적장을 쓸어 트림 같이, 패전할 징조가 짙어가는 대한민국을 구하시기 위해, 전쟁터에 있을 때에도 "매일 성경 한 장을 읽고, 기도를 올리지 않고서는 잠자리에 들지 않는다"고 고백하는 미국 장로교 교인인 맥아더 장군을 택하여, 대한민국을 수렁에서 구하는 중책을 맡기신 후, 그에게 지혜를 주셨으며, 승리의 길로 이끌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움 받은 UN군 총사령관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기만작전과 Xray 작전, 그리고 팔미도 등대 탈환작전 등을 모두 계획하고 실행하여, 성공 확률 5000 분의 1이라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케 하심으로 위기에 빠져 있던 대한민국이 회생하게 만드셨다.

 

만약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지 못했거나, 없었더라면 대한민국은 김일성에게 손을 들고 영영 지도 상에서 사라지는 비운의 나라가 되어, 오늘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공산주의 세습 독재 아래에서 허덕이게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우리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무엇 보다 중한 삶의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의 은혜 임으로, 그 가치가 실로 크고 높은 것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이와 같은 은혜를 입은 우리는 위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드러나지 않은 곳에서 생명을 잃기까지 어려운 전쟁한 수행한 많은 분들께 감사 하면서, 그들이 지니고 있던, 주님 사랑하는 마음과,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우리도 배우면서 감사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

   

(감사합니다)


Sh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