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 상륙 작전

 

   장사 상륙 작전은 성공 확률이 지극히 낮은 인천 상륙 작전을 성공 시키기 위해, 침략군에 대한 기만 전술로 한시적으로 실시한 작전이었다. 주 작전인 인천 상륙 작전을 시작하기 전에, 정 반대 쪽으로 우군을 상륙 시켜 적군의 이목이 그 쪽으로 쏠리게 만든 다음, 주 작전을 시행케 함으로써 성공하게 이끈 작전이다. 

  

1. 장사 상륙 작전 시행의 필요성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 4시, 북한군은 242대의 탱크를 앞세우고 중장비로 무장한 7개 사단 규모의 막강한 병력이 38선 전역에서 일제히 기습 남침을 가해왔다. 칼빈 소총과 M1 소총으로 경무장 하고 있던 국군은 막강한 북한군의 공세를 당해내지 못하여, 파죽지세로 밀리고 밀려, 3일만인 6월 28일 수도 서울을 그들에게 내어 주었고, 계속 남으로 밀려 전쟁이 시작되고 1개월이 조금 지난 8월 초순에는 아래 도면과 같이 경남 지역 일부만을 남겨 둔 전 국토가 북한군에게 유린 당하는 어려운 처지에 이르렀다.

  

 Image result for 낙동강 전선 남북한군 대치도

1950년 7-8월 우리 나라가 위기에 빠져 있을 때의 낙동강 지역 대치선

    

2. 한국을 돕기 위한 유엔군의 참전

   북한군의 남침으로 어려움에 처한 한국을 돕기 위해 드디어 UN군이 속속 들어왔다. 처음에는 UN군이 낙동강 전선에 배치되어 한국군과 함께 반격을 시도 하였으나, 막강한 북한군을 밀고 올라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때 UN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맥아더 장군은, 적지인 동서 해안 어느 곳을 택하여 상륙하는 작전을 검토하고서는, 인천 상륙 작전을  실시하자고 했다. 그러나 미국 국방성을 비롯한 많은 전술가들은 성공 확률 5000분의 1 이라면서 극렬한 반대가 있었지만, 맥아더 장군은 그 고집을 꺾지 않고 밀고 나갔다.

   

   드디어 미 국방성으로부터 승인이 내려졌다. 한국 국방부와 UN군은 성공 확률이 희박하다는 인천 상륙 작전을 성공 시키기 위해 은밀하게 작전계획을 수립하면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작전도 함께 수립 하였다. 첫째는 한국 해군 첩보 부대원들을 인천 항만에 있는 여러 섬으로 침투 시켜 적정을 파악함과 동시, 안전하게 상륙할 수 있는 길을 파악하여, 상륙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하는 X Ray 작전에 대한 계획과, 두 번째는 동해안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로 아군 유격대를 상륙 시켜 북한군을 혼란에 빠트리기 위한 장사 상륙 작전, 이 두 가지 계획도 함께 수립하였다.

   

   처음에는 장사 상륙 작전을 미 8군 특수부대와 한국군이 합동으로 실시키로 합의한 바 있었으나, 미군들은 얼굴 모습이 판이한 관계로,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인민 군복을 입었다 하더라도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한국군 단독으로 수행하게 되었다. 물론 해군 첩보 부대원들이 수행한 X Ray 작전도 큰 효과를 거두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는 제목으로 정한 장사 상륙 작전에 대해서만 언급 하려고 한다.

  

주 : 장사 상륙 작전 시행일시에 관하여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174호 내용에 의하면, 문산호는 1950년 9월 13일 부산 4 부두에서 유격 대원들을 싣고, 부산항을 출항하여, 9월 14일 새벽까지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해안으로 이동하여, 인천 상륙 작전 개시 예정일인 9월 15일 하루 전 날, 유격대원들이 그곳에서 상륙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달 되었었다. 하지만 심한 태풍(케지아)의 접근으로 작전 명령이 정하고 있는 날자 보다 하루 늦은 1950년 9월 14일 오후 4시, 부산항을 출항하여, 9월 15일 새벽 시간 작전 해역에 도착 함으로써, 문산호를 타고 간 유격대원들이 9월 15일 6시 상륙 작전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그 후 이 사건은 40여년 동안 비밀에 부쳐져서 은폐되어 오다가, 1900년대 말 해병대에 의하여 모래 속에 묻혀 있는 문산호가 발견 됨으로써, 이 작전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작전 명령에 명시된 내용대로, 작전이 수행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1997년 3월 6일 침몰 되었던 문산호가 인양되어, 문산호 선내에 비치되어 있는 항해일지 기록에 의하여 그간 알려졌던 작전 일시에 오류가 있음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필자는 이에 근거하여 문산호가 9월 14일 오후 4시 부산항을 출발하여, 9월 15일 새벽 현지에 이르러, 새벽 6시경에 작전이 개시 된 것으로 바로 잡아 여기에 기록하게 되었음을 미리 밝히는 바이다.

   

3. 장사 상륙 작전의 개요

   먼저 다음 동영상부터 시청하면 장사 상륙 작전을 이해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보려면 아래 제목을 클릭)

[ 인천상륙작전_설민식 역사 강의 영상 ]

https://youtu.be/PhZUQj4pbl0

(10분 07조)

    

   1950년 9월 15일에 실시된 인천 상륙 작전에 대하여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잘 알려져 있다. 당초 이 장사 상륙 작전을 계획한 것은 인천 상륙 작전이 시작되기 하루 전날 유격 특공대를 장사리 해안으로 상륙 시켜, 북한의 많은 병력이 동해쪽으로 쏠리게 만든 다음, 인천 상륙 작전을 실행 하려고 계획 하였었다. 그런데 동해안으로 접근하는 큰 태풍으로 선박 운행이 어렵게 되어, 장사 상륙 작전은 당초 계획 보다 하루 늦게 실행 되었다.

  

   그리고 이 작전을 수행한 유격 대원들은 주로 나이 어린 학생 772명으로, 그들은 군번도 부여 받지 않았고, 또 정식 계급도 부여 받지 않은채 출전했었다. 그러므로 겉 보기에는 군인 같지만, 법적인 면에서는 엄연한 민간인의 자격으로 참전했던 것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알려진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적으로 시행될 수 있었던 배후에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적과 싸우다가 희생된 나이 어린 영웅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신분 처리는 작전이 끝나고 20일 정도가 경과한 후인, 1950년 10월 5일, 뒤 늦게 입대 처리되면서 정식 육군 독립 제1유격대 부대원으로 임명 되었다고 한다.

 

4. 장사 상륙 작전 기획할 때 고려한 사항

  가. 장사 상륙 작전 목적

   장사 상륙 작전을 수행하기로 계획한 것은 이미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을 이루기 위한 기만 전술의 수행이라는 주된 목적과, 또 포항지역에서 공세를 벌이고 있는 북한군 제2군단의 후방인 장사리로 아군 유격대를 상륙 시켜, 그들의 보급로를 차단하면, 북한군의 최전선 부대가 힘을 잃게 됨으로써, 수세에 몰려 있는 우리 지상군 작전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다는 다른 목적도 내포되어 있었다. 

 

  나. 사수해야 할 낙동강 방어선

   당시 정세는 경상남도 일부만을 제외한 전 국토를 적에게 빼앗겼기 때문에,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인천 상륙 작전이 반드시 시행 성공 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은밀한 가운데 작전 계획을 수립하면서, 인천 상륙 작전을 성공 시키면 보급로가 차단된 전 북한군은 힘을 쓸 수 없게 될 것임으로, 일시에 많은 적을 궤멸 시킬 수 있게 된다는 효과 있다. 그러므로 양동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낙동강 방어 전선을 절대적으로 사수해야만 했다.

 

  다. 동해안 상륙 대상지를 장사리로 정한 이유

   동해안에서 상륙할 작전 지역을 장사리로 선택한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었다. 7번 국도가 해안선을 따라간다고 하지만 내륙을 통과하는 곳이 많았다. 만약 해안선에 근접하지 않은 지역에서 상륙 작전을 수행하여 상륙에 성공 하였다 하더라도, 보급로를 차단하는 데는 어려운 문제들이 많이 있게 된다. 그러나 장사리 지역은 도로가 해안에 바짝 붙어 있음으로 보급로 차단이 가능하다는 장 점이 있어 장사리 지역을 택한 것이다. 

      

  라. 상륙 부대 창설에 대한 문제점

   당시 형편으로 보아 장사 상륙 작전 수행을 위한 유격부대 창설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이유를 들면, 

     첫 째는 병력 보충을 위한 모병 대상 지역이 경남 일부 지역으로 줄었기 때문에 새로운 병력 확보가 심히 어렵다는 점, 

    두 번째는 낙동강 전선에 배치되어 있는 병력 중에서 일부를 차출하여 새로운 부대를 창설한다는 것 역시 불가능 한 형편이었다. 그 이유는 만약 한 곳이라도 적군에게 방어망이 뚫리면 국가의 운명이 문제 되기 때문이다.

그런 관계로 불가피 하게 선택한 것이 학도의용군의 확보였다. 

  

  마. 장사 상륙 작전 실시 일시

   인천 지역에 대한 간만의 차이가 매우 큰 것을 고려하여, 상륙하기에 가장 좋은 날 3일을 골라 그 중에서 최적일인 9원 15일로 확정하였다. 이에 따라 장사 상륙 작전 시행일을 인천 상륙 작전일의 전날인 9월 14일로 정하게 되었다. 학생 유격대가 9월 14일 동해에서 상륙 작전을 시행하면 북한군의 병력이 동해 쪽으로 쏠리게 되어,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을 기할 수 있다는 점과, 또 낙동강 전선에 배치되어 있는 북한군 정예부대가 장사리 쪽으로 분할되면, 낙동강 전선에 배치되어 있는 우리 지상군도 유리한 작전을 수행할 수 있게 된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에 장사 상륙 작전의 시행 일자를 서둘러 정했던 것이다. 

  

  바. 장사 상륙 작전 계획이 너무나 소홀

   인천 상륙 작전이 주된 작전이라는 점에 대하여는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많은 병력과 군비를 인천 상륙 작전에 투입 하다 보니, 장사 상륙 작전에 대하여는 병력과 군비 그리고 보급 등의 지원이 너무나 초라하게 계획 되었었다. 

  

   그 실례를 든다면 

    병력 수송을 위해 동원된 선박은 정규 군함도 아닌 해운공사에서 징발한 문산호(2700톤급) 단 1 척으로, 작전 지역까지의 호송만 미국 군함이 호송하였을 뿐이다.

    유격대원의 상륙을 엄호할 중화기는 수송선 갑판상에 설치된 박격포가 전부였고, 

    전투요원의 군장 역시 개인용 소총(소련제 장총)과 탄약 등으로 무장한 기본적인 경보병 수준의 무장이었으며, 

    탄약과 식량도 겨우 3일 동안 사용할 수 있는 것을 지급 하였다고 한다. 

   그런 점을 감안해 볼 때, 아무리 주된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 하지만, 피어나지도 아니한 어린 학생들을 격전지로 내 보내면서 상대방의 무장 능력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임으로, 작전을 기획한 군 수뇌부의 잘못이 너무나 크다고 생각된다.

  

  사. 기타 참고사항

   당초 계획할 때,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되면 장사리 해안으로 상륙 시킨 학생 유격대는 곧 철수 시킨다는 계획이라고는 하나,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지 않고 겨우 3일분의 군수 지원으로 경험이 전혀 없는 어린 학생들을 적지로 몰아넣은 것이니 너무나 가혹한 처사였다. 그렇지만 그들은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인민군 복장에다 인민군이 사용하는 소련제 장총을 들고, 강하고 사나운 파도를 뚫고 힘겹게 밧줄을 잡고 물속을 지나 상륙 하였다. 그 때 앞서 상륙하던 전우들이 총탄을 맞고 쓰러지는 것을 목격 하면서도 끝까지 분전 하였으니, 장하기 그지 없다. 

  

5. 상륙한 유격부대의 편성

   작전에 참가할 병력의 총 인원수를 786명으로 정하였는데 그 내역은 대략 다음과 같다. 

   부대원 718명, 선원 44명, 통신부대원 8명, 작전부대장과 부관 각 1명, 직접 작전에 참여하는 인원은 모두 772명이었고, 그 외 작전 지원 요원으로 고문, 통역, 헌병, 미군 안내원, 등 등 14명의 추가된 인원이 있음으로 모두 786명이었다.

  

   상륙 작전을 직접 담당한 요원들은 1950년 8월 24일 대구지역에서 긴급히 모병한 인원 500 여명과, 다른 지역에서 모병한 200 여명을 주축으로, 8월 27일 육군본부 직할 독립 제1유격대가  밀양에서 창설 되었는데, 이 때 지휘관으론 이명흠 현역 소령이 임명 되었다. 

  

   그들은 1950년 8월 31일까지 5일 동안 밀양에서 기초적인  군사 교육을 마친  다음, 부산 육군본부 청사로 옮겨가서 9월 11일까지 유격 부대에 대한 특수 교육을 추가로 받음으로, 유격부대로서의 면모를 갖춘 부대 편성이 완료 되었다.

   

   부대는 편의상 정규사단 형태로 편제 하였고, 유격부대의 특성상 군번과 계급을 부여하지 않고 모두 임시계급을 부여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그리고 유격대는 4개 연대로 나누어 1개 연대 병력을 약 180명으로 구성하였으며, 지휘관에 대하여는 모두 대령 혹은 중령 등의 임시 계급으로 임명 하는 등, 형식적인 면에서 완전 사단의 체제를 갖추었던 것이다.

  

   이 때 편성된 부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총 사 령 관

전 술 고 문

참   모   장

: 이 명 흠

: 전 성 호

: 백 운 봉

(현역소령)

(육군대령)

(현역대위)

본 부 사 령

인 사 참 모

작 전 참 모

정 보 참 모

군 수 참 모

정 훈 부 장

의 무 부 장

통 신 부 장

: 조 수 경

: 이 수 희

: 김 응 록

: 이 승 삼

: 이 태 호

: 서 상 덕

: 이 봉 구

: 권 찬 두

연   락   관

: 이 홍 배

(현역중위)

제28연대장

제29연대장

제32연대장

제37연대장

: 이 영 훈

: 문 학 경

: 이 원 직

: 오 운 환

  

6. 장사 상륙 작전의 시행

  가. 상륙 작전 시행하기 전에 당한 선박의 좌초

   문산호는 부산에서 상륙 작전을 수행할 유격대원들을 태우고 14일 오후 4시 부산항 제4부두를 출항하여 미군 함정 앤티코트 함의 호위를 받으면서 장사 해변을 향해 북상하였다. 문산호는 15일 새벽 5시경 상륙지점 인근 해역에 도착하였으나, 강력한 태풍의 접근으로 파고가 4~5m에 이르는 험한 날씨였다. 거기에다 어두운 밤이었고, 짙은 안개 등으로 시야가 극히 좁은 역경을 헤치면서 서서히 장사리 해안으로 접근 하고 있었는데, 새벽 5시 30분경 수심이 얕은 곳에서 풍랑에 밀려 배가 모래 위에 좌초 되었으니, 정상적인 상륙 작전을 실행하기도 전에 적의 집중 사격을 받게 될 위험에 이르렀다. 

           

  나. 당시 장사리 지역의 적정

   당시 장사리 주변의 적정은 다음과 같았다. 포항 형산강(兄山江)을 중심으로 적군 제5사단과 아군 제3사단이 대치하고 있었다. 적군 5사단은 형산강 일대에서 치열한 공방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후방인 장사리에는 북한군 제 101 치안연대 소속 소수 병력만을 배치하여 해안 경비와 치안 유지를 담당하게 하였으니, 장사 상륙 작전은 그와 같은 적의 허점을 찾아 뚫고 공격해 들어간 것이다. 그렇지만 적들은 혹시나 한국군의 상륙 작전이 있을까를 대비하여 해안 여러 곳에 구축해 놓은 벙커(bunker)와, 장사리 남쪽에 있는 지경동 고지와 북쪽에 있는 부흥동 고지 등 주변 야산에 포대를 구축해 두었으니, 772명의 병력으로 공격하기엔 힘든 상대였다. 

        

  다. 역경 속에서 강행된 상륙 작전

   비록 상륙함이 좌초되었다 하더라도 6시엔 반드시 상륙이 시작 되어야 할 작전이었다. 그렇기에 6시가 되자 1개 중대 유격대원들이 2개의 고무 보트를 이용하여 상륙을 시작 하였더니, 주변 고지에 있는 북한군으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게 되어. 순식간에 많은 전사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 그러자 다시 7명의 특공대를 상륙 시켜 해안 가까이에 있는 소나무로부터 상륙함 까지 약 90m 사이를 긴 밧줄로 연결 시켜, 상륙하는 대원들이 그것을 잡고 바닷물을 헤치면서 상륙 하도록 만들었다. 

 

   밧줄을 잡고 바다 물을 헤치면서 제28연대가 상륙을 시작하자 또 다시 적이 가해 오는 집중 공격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때 좌초된 선박 갑판 상에서 박격포로 적을 향해 응사하기 시작하자 적의 공격이 주춤하는 사이 제 29, 제 37, 제 32 연대가 추가로 상륙하여 해안 일대를 평정 하였고, 다시 인근 여러 고지에서 포격을 가해 오는 적들을 제압 함으로써, 일단 상륙 작전 교두보를 구축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때 남쪽에 있는 지경동(200) 고지에서 완강하게 저항하던 적들이 있었지만, 아군 32 연대가 공격하자 견디지 못하고 도주 함으로써, 9월 15일 오후 2시 50분 경 200 고지를 접수한 후, 아군 상륙 부대 지휘부를 그곳에 설치하고, 다시 산개하여 장사리 인근에 있는 적의 포진지와 남아 있는 적들을 소탕 하였고, 또 장사리 북쪽에 있는 271고지와 구계리 뒤편에 있는 봉황산을 공격하여 영덕으로 이어지는 적의 주요 보급로를 차단하는데 성공하였다. 

        

  라. 작전 초기 당한 아군의 피해

   처음 상륙을 강행할 때, 좌초 되었던 문산호는 적군의 포화를 맞고 선미가 파괴 되었고, 또 닻줄도 끊어져 운항이 불가능 한 상태가 되었다. 계속되는 적군의 공격으로 문산호는 수장될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처음 상륙을 시작할 때, 앞장섰던 일부 지휘관과 많은 병력이 전사 하거나 파도에 휩쓸려 실종 되었고, 또 SCR 694 장거리 무전기도 바닷물을 지나는 사이 불통 상태가 되었으며, 통신반장과 전술 고문인 전성호 대령과 문산호 선장이 전사하였다. 그리고 상륙한 다음 장사리 인근 야산에 있는 적 포대를 점령할 때까지 아군이 당한 피해는 전사자 60여명에 많은 부상자가 발생 하였으니, 이 때 전투가 얼마나 치열 하였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마. 장사 상륙 작전 시행으로 얻은 작전상의 유익

   이와 같은 역경을 극복 하면서 시행한 장사 상륙 작전이 성공 되었기에, 서해안 인천에서 시행한 역사적인 인천 상륙 작전도 성공하게 되었다. 그리고 서해 쪽에서는 서울 탈환을 위한 작전이 한창 진행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포항 지역까지 진출한 적군의 보급로 차단도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바. 적의 반격으로 어려움에 처한 유격대

   이제 유격대는 당초 계획하였던 3일 간의 작전이 거이 끝날 무렵이었다. 후방을 차단 당한 적 제5사단은 T-34/85  전차 4대를 앞세우고 정예부대로 편성한 2개 연대 규모의 병력이 급거 장사리 지역으로 북상해 오고 있었다. 장사리에 상륙한 유격부대는 중화기도 없고, 실탄도 거이 떨어졌으며, 지급된 식량도 소진되었고, 무전기도 해수 침범으로 불통이 된 어려운 상태에 있었으니 외로운 전투를 벌여야만 했다.

  

7. 유격대의 철수작전

  가. 육상을 통한 철수작전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어려운 입장에 처하였을 때 유격대장은 2명의 연락병을 선발하여 상부로 급파하는 한편, 17일 일몰을 기하여 28, 32연대는 각 1개 대대 병력만 잔류 시키고 전원 지휘부가 설치되어 있는 200 고지로 이동 배치했다. 그리고 18일 새벽 2시 30분 경 지휘부를 다시 좌초된 문산호로 이동 시켰다. 9월 18일 아침 7시 40분 경, 28, 32연대의 잔류부대를 완전 철수시켜 200 고지 주변에 포진 시켜 적과의 최후의 일전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18일 오전 9시 적 선발대가 200 고지로 공격을 가해 오기 시작했다. 아군이 이들에게 맹렬한 반격을 가하자 적의 공격은 일단 멈추었지만, 유격대는 남아 있는 실탄으로 적의 공격을 더 이상 저지하기가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되어, 해안선을 따라 육상 남진 후퇴를 결정하게 되었다. 오후 12시 50분을 기하여 전투행위를 모두 중단하고 제28, 29, 37, 32연대 순으로 도로를 따라 약 3㎞ 정도 남진(南進)하고 있었다.

 

  나. 철수 작전의 변경과 미 해군 함정의 지원

   장사리를 떠난 유격부대가 약 3㎞ 정도 남진(南進)하고 있는데, 외항 먼 곳에 도착한 미 순양함으로부터 날아온 헬기에 의하여, 미 해군과 육군본부와의 연락이 이루어 짐으로써, 19일 일출 전까지 장사리 해안에 집결하여 선편으로 철수하기로 철수 방법이 변경되었으니, 유격대는 다시 장사리 방면으로 방향을 돌려 북상하게 되었다. 남진하던 역순으로 32 연대부터 앞장 서 북상하고 있을 때, 적군은 아군이 철수하여 비어 있는 200 고지에 진을 치고, 아군의 북상을 저지하고 나섰다. 그래서 오후 4시 경 다시 접전이 시작되었으나, 이번에는 공중과 해상에서 아군을 엄호하는 폭격과 함포사격이 있음으로, 오후 6시 50분 경, 좌초된 문산호 부근까지 모두 집결하게 되어 철수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다. 철수 작전의 어려움

   9월 19일 오전 5시 15분 경, 철수를 위한 LST함(조치원호)에서 미 해군 소령 1명이 보트를 타고 문산호로 찾아와, 유격대장과 철수 작전을 협의하여, 중경상자, 제28, 37, 지휘부, 32, 제29연대 순으로 철수순서를 정하는 한편, 높은 파도로 인하여 철수용 LST함이 해안까지 접근하기 불가능 함으로 약 200m 정도 떨어진 해상까지 접근한 후, 육지와 함정 사이를 연결 시킨 밧줄을 잡고 바닷물을 헤쳐나가는 방법으로 수송선에 오르기로 했고, 또 철수 개시 시간은 아침 6시 30분으로 결정하였다. 6시 30분부터 미군 함정의 엄호사격과 동시에 철수작전이 시작 되었는데, 파도가 너무 높아 완전 무장한 대원들이 파도를 이기지 못하여 물속으로 휩쓸려 익사하는 일들이 계속 생겨났다. 이것을 지켜보던 미 해군 소령의 제안에 따라 유격대원들은 군장을 모두 벗어 바다에 던지고 간편한 복장으로 철수를 계속하였다.

        

  라. 일부 유격대원들을 적지에 남겨두고

   높은 파도로 인하여 오후 3시가 넘을 때까지 철수가 지체 되었는데, 200 고지에 포진하고 있는 적으로부터 맹렬한 포격이 날아오기 시작 함으로, 아군의 피해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철수작전은 예정시간을 훨씬 넘길 때까지 계속 진행되고 있었지만 해안에 남아 있는 상당 수의 유격대원들이 아직 승선하지 못하고 대기하고 있었다. 이 때 적의 박격포탄이 LST함 가까운 바다에 떨어지자, 미 해군 소령은 구출용 LST함도 좌초된 문산호와 같은 꼴이 될까 우려한 나머지 철수작전의 종료를 선언하고 LST함 선수 문을 닫고 후진을 시작 하였으니, 승선하기 위해 대기 중이던 3-40 명의 유격대원을 모래 사장에 남겨 두고, 수송함이 떠났으니 그들은 최후의 순간까지 적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다.

  

8. 장사 상륙 작전의 시행 결과 

   1950년 9월 15일 새벽부터 19일 오후까지 5일 동안 장사리 일대에서 작전한 육군본부 직할 독립 제1유격대의 전과와 피해 손실을 대략 다음과 같다.  

  

  가. 상륙 작전에서 얻은 전과

     (1) 적 제5사단의 배후 공격으로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였고 적의 후방을 교란시켜, 아군 작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2) 9월 15일에 이루어진 인천 상륙 작전 성공에 기여한 바가 크다.
     (3) 적군 병력 살상 : 사살 270명, 포로 4명 
     (4) 적군 시설 파괴 : 방카 폭파 11개소, 교량 파괴 2개소, 도로 파괴 6개소
     (5) 노  획  물 : 직사포 3문, 포탄 450통, 지프차 1대, 기관총 4정, 로켓트포 1문, 다발총 5정, 소련식 장총 12정, M1소총 9정

  

  나. 아군 피해와 손실
      (1) 전  사  자 : 139명(LST 선원 및 장사리 잔류대원 포함)
      (2) 부  상  자 : 92명 (LST 선원 17명 포함)
      (3) 시설 피해 : LST 문산호 1척( 2,700톤급)
 
   좁은 안목으로 보면 위에 적기한 바와 같은 전과를 올렸다고 보지만 넓은 안목으로 보면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을 위한 양동 작전이 성공했다고 본다. 

 

   그리고 북한군은 장사리로 우리 군 2개 연대가 상륙한 것으로 오판한 까닭에, 치열한 낙동강 전선에 배치되어 있는 북한군 정예부대 병력2개 연대를 차출하여, 장사리로 북상케 하였으니, 아군의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려던 북한군의 계획에 차질을 초래케 하였다고 본다.

 

10. 작전에 대한 평가

     (1) 더그라스 맥아더 장군은 장사 상륙 작전이 인천 상륙 작전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그렇지만 그 작전의 성공은 부대원들의 엄청난 혈전 끝에 이룩한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맥아더 장군은 1960년 10월 31일 친필 서명하여 유격동지회(장사 상륙작전에 참가했던 학도병들이 나중에 결성한 단체)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는데 그 내용의 요점은 다음 청색으로 표시한 글과 같다.

  (전략) The operation they performed in support of the Inchon Landing was a brilliant one and sacrifice of its members will always be a shining example for the youth of Korea. (후략)” 

  제1유격대대가 인천상륙작전을 지원하여 수행한 작전은 최고의 찬사를 받을 만하며, 대원들이 보여준 용기와 희생적인 행동은 한국 젊은이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고 평했다.

     (2)  그리고 많은 작전을 지휘한 전략가들은 말하기를 작전의 계획, 구성, 지원 등 등에 대하여는 너무나 잘못된 점이 많았다고 평가하였고,

     (3) 유격대원의 대부분은 학생으로 구성된 학도병으로, 훈련기간도 겨우 2주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생애 처음 출전한 전투에서 상대방의 화력이 막강 하고 치열 하였음에도 적군에게 항복하지 않았다는 점에 대하여는 그 용기와 기백이 대단하다고 평가했다.

     (4) 탄약, 장비, 무전기, 선박 등 모두가 여유 없이 계획 되었다는 점과, 3일 동안 전투를 진행하겠다면서 딱 3일간의 보급 물자만을 지급 하였지만, 그들이 그것으로 배가 되는 기간을 버텼다는 것은 참으로 기적이라고 평가했다. 

 

11. 참고사항 

(1). 이 작전 중에 좌초 되었다가 침몰된 문산호는 1997년 3월 6일 해병대에 의하여 갯벌 속에서 발견 됨으로써 장사 상륙 작전과 어린 학도병들의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이 백일 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2). 장사 상륙 작전을 정확하게 그리고 더 자세하게 알기 위해서는 다음 동영상을 시청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보려면 아래 제목을 클릭)

[ KFN 특집 다큐 비사 장사상륙작전 ]

https://www.youtube.com/watch?v=IN_mXBMUJQg

(45분 39초)

 

[ 장사상륙작전 배수용 참전용사 인터뷰 ]

http://www.phmbc.co.kr/television/donghaein/vod?idx=220430&page=6&mode=view

(36분 20초)

 

[ 작전명174호 총 사령관 이명흠 ]

https://www.youtube.com/watch?v=GStIkE7XRbo

(38분 26초)

 

12. 필자가 느낀 점과 소망하는 사항

   오늘 날 전쟁을 체험하지 못한 일부 정치인들과 친북 세력들이, "해군"을 가리켜 "해적"이라고 폄하하여 말한 자가 있었고, 또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 "적"을 "적"이라고 말하지 말라는 지도자도 있었으며, 많은 젊은 이들이 피 흘려 지킨 NLL선을  "영토 선도 아니고, 잘못 그어진 선이기에 포기할 수 있다"는 등의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말을 거침 없이 내어 뱉은 지도자도 지난 날 있었다. 해군에 7년 동안 몸 담고 나라를 수호하기 위해 적과 싸우면서 사선을 넘기도 하였으며, NLL선을 지킨 저로서는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느끼면서, 한 때 분노한 적도 있었다. 어찌하다 우리 국민들의 사고가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이제는 염려가 지나 걱정에 이르렀다가, 다시 그 선을 넘어 근심의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 같다.

  

   장사 상륙 작전 격전지에서 나라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초개 같이 던진 분과, 위험 앞에 굴하지 않고 싸우신 분들이 있었기에, 오늘 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과, 우리가 그 가운데서 행복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분들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 받아 우리 모두가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를 위하고, 나라를 지키는데 최선을 다하시는 분들이 꼭 되어지기를 소망 하면서 이 글을 매듭 짖고자 한다. 

    

주 : 66년 전 하나님께서 저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 

 

   이 글을 작성한 저도  위에서 언급한 유격대원들처럼 1950년 6 25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중학교 5학년에 재학하고 있던 17세의 소년이었다. 조국이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유린 당하는 것을 보았을 때, 피 끓는 젊은 이라면 어느 누가 나라를 구하려고 나서지 않겠는가?  8월 초 거제 섬에 있던 필자도 해군 모병관의 호소를 듣고 즉석에서 입대 지원서를 작성하여 제출 함으로써, 1950년 8월 15일 현역 해군에 입대한 자이다. 

 

가. 생명을 잃지도 않았고, 큰 부상도 당하지 않았으니 감사하다

   필자도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을 때, 전투함의 일원으로 원산 흥남, 북청, 단천, 신포, 백령도 등의 북한 연안을 넘나들면서 사선을 수 없이 넘었던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래도 저는 처음부터 현역 군인이었고, 무장한 군함에서 전투를 시행하였으니 장사리에서 상륙 작전을 수행한 유격대원들 처럼 혹독한 시련을 겪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저에게도 전쟁을 통하여 얻은 흔적이 너무나 크고 아프다. 청력 상실과 위장 질환의 득병, 그리고 배움의 길이 중도에 꺾이었던 관계로, 배우지 못한 것을 보충할 때까지, 학벌 위주인 사회로부터 많은 차별과 멸시와 천대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을 잃거나 심한 부상을 당치 않고, 오늘 날까지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 감사하다.

 

나. 신병 동기생들과 비교해 볼 때도 감사하다

   필자의 신병 동기생들은 1000명이 조금 넘었다. 그 중 약 3분의 2 정도의 전우들이 신병 교육이 끝나자 해병대로 넘어가서, 제주도에서 훈련 받은 해병대 3기생들과 함께 통영, 여수, 인천, 원산, 등의 상륙 작전과 또 북진하는 대열에서 치열한 전투를 수행하다가, 많은 전우들이 유명을 달리 하였으니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다. 그러나 저는 전쟁이 계속되던 험난한 가운데서도 생명을 유지하게 되었음은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 인생의 밑바닥까지 떨어진 자를 하나님이 지켜주셨다

   1950년 6 25 전쟁이 일어난 직후인 7월 4일 필자가 살던 영월 땅에도 북한군이 들어왔다. 침략한 북한군이 병력을 보강하기 위해 청년과 학생들을 잡기 위해, 필자가 피난하고 있던 곳으로 두 명이 오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러자 필자의 어머니는 "한민아! 북한군에게 잡히지 않도록 잠시 이곳을 떠나 빨리 숨으라"는 말씀을 하시기에, 철없는 저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쉽게 어머니 옆을 떠난 것이 북한군에게 쫓기고 쫓기다가, 거제도까지 내려갔다. 

 

   낯선 땅 거제도에 들어간 소년 학생, 수중에는 돈 한 푼 없었고, 몸에 걸친 옷이라곤 땀에 저린 학생복 한 벌, 잠 자리는 부두 가에 가마니를 깔고 이슬을 맞는 곳, 먹는 것은 남의 집 대문에서 얻어 먹는 밥, 얼마 지난 후부터는 농가로 들어가서 머슴 아닌 머슴이 되어 막노동 하는 일꾼, 그리고 밤만 되면 들려오는 포성으로 근심 걱정에 쌓여 하늘에 떠 있는 달을 처다 보고 부모님을 그리면서 울다가 밤을 세워야 하는 정신 병자, 그야 말로 인생의 밑 바닥까지 떨어진 가련한 인생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지켜 주셨으니 감사하다.

 

라. 나라를 지킬 수 있는 군인이 되게 하셨으니 감사하다

   8월 초,내가 피난 와 있는 마을에 경찰관과 해군 모병관이 나타나더니, 주민들과 피난 와 있는 청년 학생들을 향하여 "청년 학생들이여,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나서서 나라를 지켜 주셔야 하겠습니다"라고 호소하는 말을 듣고, 중학교 5학년 학생인 17세의 소년이었지만,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한 목숨 버리겠다는 결심을 하고, 즉석에서 입대 지원서를 작성하여 지장을 찍은 다음 모병관에게 제출하였더니, 모병관이 징발한 선편으로  진해로 이동하여, 해군 신병 교육대 병사(兵舍)로 들어갔다. 

 

   약 1주일이 지난 8월 15일 "나는 대한민국 군인으로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고, 법규를 준수하며,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고,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을 엄숙히 선서합니다"라는 선서와 함께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자를 만들어 주셨으니 감사하다.

 

마. 전술을 익힐 때까지 최전선 배치를 늦추어 주셨으니 감사하다

   8월 15일 입대 선서를 하고 난 다음부터는 전쟁터에서 살아 남기 위한 호된 신병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그런데 해군으로 입대한 신병들에게 해군에게 필요한 전술 교육은 전혀 실시하지 않고, 매일 같이 육상 전투 때 필요한 육전술(陸戰術)만 교육 시키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국토의 거이 다를 북한군에게 빼앗겼기 때문에, 낙동강 방어전선으로  배치해야 할 시급성 때문이었다.

 

   신병 교육이 거이 끝날 무렵, 많은 동기생들이 수십대의 해군 트럭을 타고 해병대로 넘어가는 것을 보자, "나도 곧 어느 전선이 될지는 알 수 없으나 치열한 전쟁터로 배치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후배 신병들을 양성하는 교육 요원으로 남게 되었으니, 전쟁의 주도권을 아군이 장악할 때까지 최전선 배치를 하나님께서 유보케 하신 것이니 감사하다.

 

바. 종합해 볼 때

    (1) 인민군에게 잡혀가지 않도록 지켜 주셨으니 감사하다. 만약 인민군에게 잡혀갔더라면, 원하지도 않은 인민군이 되어,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갔다가, 맥아더 장군이 지휘한 인천 상륙 작전으로, 독 안에 든 쥐처럼 죽음의 길 아니면, 고통의 길로 들어가게 되었을 것이다.

 

    (2) 요14장 1절 말씀처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는 말씀대로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인생 밑바닥까지 내려 갔지만, 하나님을 믿고 의지 하였더니 하나님께서 살 길을 열어 주셨으니 감사하다.

 

    (3) 전술이 익숙해 지기 전에 치열한 전쟁터로 나가게 되면 "한 번 쓰고 버리는 총알바지 소모품 군인"이 될 수 있을 것임으로, 신병 교육 후 바로 최전선으로 보내지 않고, 더 훈련케 하고 경험을 쌓게 한 후, 최전선으로 나가게 하셨기에, 생명을 보지 하였으니 감사하다.

 

    (4) 만약 인천 상륙 작전이 실패 하였더러면 역시 치열한 육상 전선으로 출전하게 되었을 것이니, 어느 전선 외진 곳에서 17세의 어린 나이로 적탄을 맞고 인생의 종지부를 찍게 되었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인천 상륙 작전을 성공케 하여, 국가와 민족과 나 자신에게 큰 은혜의 선물을 내려 주심 또한 감사하다.

   

    (5) 장사리 작전에 참전한 유격대원들의 나이는 17-8세, 신분은 학생, 입대 시기는 8월, 신병 훈련 기간은 단측 교육, 모든 면에서 필자와 너무나 비슷한 점이 많다. 그런데 그들의 약 30%의 해당하는 대원들이 피어나지도 못하고 떨어진 꽃, 아니면 꽃 잎이 떨어지는 등의 상처 입은 꽃이 되고 말았다. 필자 역시 신병 동기생 1000여명 중, 약 70%에 해당하는 전우들이 해병대로 넘어 가서, 악전 고투 끝에 많은 사상자가 생겼으나, 저는 하나님께서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심으로 무사하니 감사하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2016년 9월을 맞게 되었다. 66년 전, 어머니가 싸 주시는 소두 4되 정도의 쌀을 받고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 보다 귀한 것임을 깨닫게 하셔서, 얼른 방으로 들어가서 합부로 된 성경 찬송 한 권만을 달랑 들고 어머님 옆을 떠나 피난의 발길을 내디뎠다. 외로울 때, 고달플 때, 어려움이 닥칠 때 마다 "나는 갈길 모르니 주여 인도 하소서"라는 찬송가를 부르면서, 주님을 믿고 의지 하였더니, 모진 환란이 진행되는 가운데서, 죄 많은 저를 특별히 하나님께서 지켜 주심으로, 지금은 83세의 노구가 되어, 부요한 나라 미국에서 행복을 누리면서 살 수 있게 인도 하셨으니, 저에게 베풀어 주신 주님의 은혜가 너무나 큰 것 임을 깨닫고, 감사 감사 또 감사함을 드리면서 글을 마치려고 한다.   ---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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