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L 타고 미국으로 이민오신 조부모님 

 

   1887년 4월과 8월에 출생하신 저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지난 6월, 미국으로 이민을 오셨기에 지난 7월 28일 오후 4시 원근 각지에 살고 있는 자손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린 적 있습니다.

 

   이 예배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가 너무나 큰 뜻 깊은 예배였기에, 가장 먼 곳으론 지구의 저편 끝에 있는 캄보디아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는 동생 내외도 잠시 짬을 내어 10000 마일이 넘는 이곳까지 날아와서 함께 감사예배를 드린 후 곧 바로 임지로 돌아갔었지요. 그렇지만 저의 부모님 양위분과 형님 내외분은 장미동산(Rose Hill Memorial Park) 풀밭에서 부활의 날까지 고요히 주무시고 계시는 관계로 뜻 깊은 예배에 참석할 수는 없었지만, 직계 손자 손녀, 손부, 손서 또 증손자녀 고손자녀들까지 함께 모여 드린 뜻 깊은 감사예배였습니다.
 

   두 분 모두 1887년에 출생하셨으니 지금 127세가 되셨는데 언어와 풍습이 다른 미국으로 이민을 오셨다니, 그게 무슨 말인지?

 

   사실을 밝히겠습니다. 조부님은 삼일 만세사건이 일어난 직후 일본에게 빼앗긴 조국의 국권을 되찾기 위해, 상해 임시정부 운영자금인 군자금을 모금하여 상해로 송금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1921년 5월 징역 7년의 형을 선고받고 3년 동안 옥고를 치르신 다음 감형으로 석방되신 독립운동가였습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던 젊은 시절 조부님은, 한 때 주님을 섬기는 조모님의 교회 출석을 막으면서 독립운동에만 전념하였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고, 주님을 영접하는 자만이 구원을 얻어 영생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드디어 1915년 즐기던 술 담배를 모두 끊고, 주님을 영접한 후 열심을 다하여 주님을 섬기다가, 1926년에는 풍기성내교회 집사로, 1940년에 이르러서는 풍기북문교회(현 풍기제일교회)를 떠받드는 장로로 장립하여 충성하신 분으로 변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신 귀중한 장로의 직분을 받았기에 부끄럼 없이 살겠다고 다짐하고서는 말씀에 어긋나는 일이라면 생명을 내놓고 반대하는 철두철미한 그리스도 인으로 변신하시게 되셨습니다. 그래서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는 일제가 강요하는 신사참배를 반대하시다가, 다시 일본 경찰에게 잡혀 옥고를 치르신 철저한 그리스도 인으로 사시다가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채 1944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신 분이시니, 죽기까지 신앙의 길을 달려가신 분이십니다.
 

   조모님은 1905년 초 조부님과 결혼하여 풍기에서 신혼살림을 차렸습니다. 조모님의 친정 식구들은 1907년 미국 북장로교에서 파견한 Anderson 선교사가 서울 새문안교회 전도대와 함께 풍기지방으로 내려와서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을 영접하고서는, 출가한 딸인 저의 조모님의 구령을 위해 기도하며 애쓰다가 드디어 1912년 조모님께서 주님을 영접하게 함으로써 우리들에게 믿음을 전수해 주신 조상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조모님의 신앙 생활 초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고 합니다. 남편이신 조부님은 완고한 유고 사상에 젖어 있는 양반 가문의 젊은 이었는데, 거기에다 항일 사상이 강한 관계로 군자금 모금을 위해, 밤만 되면 남 모르게 돌아 다녔으니 참으로 어려움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항일 운동은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은밀하게 활동해야 하는데, 아내가 일본이 가장 싫어하는 철저한 기독교 신자가 되었으니 감시의 대상이 될 것이 뻔함으로, 조모님의 교회 출석을 강도 높게 반대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조모님의 신앙생활이 어찌 평탄했겠습니까?
 

   그러던 중 1921년 초, 조부님으로부터 군자금을 내 달라고 강요받은 우리 민족 가운데 어느 부자 한 사람이, 뒷구멍으로 일본 경찰에 밀고함으로써 조부님은 영어의 몸이 되고 말았지요, 

   그렇게 되자 조모님은 더욱 주님께 매달려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어, 주님을 위해 헌신할 것을 굳게 다짐하고서는, 자신의 본명 김화백을 "주님을 사랑한다"는 뜻을 가진 김주애로 바꾼 다음, 원주지방에 있는 Morris 선교사의 추천을 받아 영월교회(현 영월중앙교회) 소속 전도부인이 되어 주님을 위해 충성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전도 사업을 시작하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오갈곳이 없게 되어 고민하고 있었는데, 주님께서는 주님을 위해 충성하는 자를 절대 버리시지 않고 구해 주시는 철두철미 하신 분이었습니다. 

   고아가 된 아들을 선교사가 세운 대구계성학교에 입학 시켜 주셨으니, 세 명의 가족이 하나는 형무소에, 하나는 학교 기숙사에, 그리고 하나는 전도를 위한 떠도는 생활, 비록 이와 같이 갈라져서 살지만, 주님께서 소망의 길로 인도해 주셨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내려주신 은혜가 너무나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니, 감사하면서 험준한 강원도의 산골길을 누비면서 주님의 일에 열심을 다하여 충성하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씨를 뿌린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는 말씀처럼, 10 여 년간 노심초사하면서 악조건 속에서 열심을 다하여 충성하였더니, 그 결과가 열매로 나타났는데, 영월 지역에 13개 교회(영월, 영춘, 녹전, 별방리, 사자원, 북면, 가느골, 마차, 대야리, 가곡, 덕전이, 보발, 이름 확인 못한 교회 한곳)가 주님의 반석 위에 튼튼하게 세워지는 좋은 열매를 거두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 조모님으로부터 들은 것 한 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전도하기 위해 높은 재를 넘고 강을 건너 외롭게 길을 걸어 갈 때는, 항상 찬송가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슬프고 또 외로와 정처 없이 다니니, 예수 예수 내 주여 지금 내게 오셔서, 떠나가지 마시고 길이 함께 하소서" 

   이 찬송가를 반복해 부르면서, 자동차도 다니지 않는 험하고 외로운 길을 걸어 다니면서 전도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조모님의 입장에서는 이 찬송가의 가사가 바로 자신의 형편을 잘 그린 것이었기에 외로움을 달래면서, 철저히 주님을 의지하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을 저는 들었습니다.

 

   조모님께서는 1948년 1월 안동읍교회에서, 대한 예수교장로회 경안노회에서 주관하여 열린 노회 관내 교역자를 위한 특별 사경회에 참석하였다가 임지인 풍기교회로 돌아가던 중에 교통사고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신 것입니다.

 

   조부님께서는 나라를 위한 독립운동가로, 교회를 위한 장로님으로, 조모님께서는 복음의 씨를 뿌리기 위해, 이와 같이 두 분 모두 선한 싸움을 싸우면서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키신 분들이고, 또 저희들에게 무엇 보다 귀한 믿음을 물려 주셨으니 손자인 저희들로서 어찌 두 분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소천하신 후 두 분의 유해는 한 때는 공동묘지에서, 또 한 때는 불법 점유지에서, 그리고 납골당 등등 여러 곳을 전전하였고, 거기에다 자손들은 모두 외국에 나가 살고 있어 자주 찾아가지 못한 관계로, 버려진 묘지 같이 된 적도 있었기에 손자인 저로서는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금년 5월 저의 형제들이 의논하여 비록 조부모님이 한 평생을 사셨던 조국을 떠나는 것이 마음에는 걸리지만, 자손들이 자주 찾아가서 뵈올 수 있는 곳으로 옮겨 모시기로 결정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결정에 따라 소요 경비를 산출하여 모금함과 동시, 형제 중 한 사람(넷째 손자)이 한국으로 나가 조부모님 유골을 미국으로 모셔왔으며, 두 분께서 영구히 사용할 수 있는 묘지를 구입한 후, 감사예배를 드림으로 조부모님의 이민, 그리고 영주 절차 모두를 마치게 되었으니 감사 감사 또 감사할 뿐입니다.

 

   요즈음 저는 자동차로 불과 2-3분 거리에 조부모님을 모시게 되었으니, 지난 날 자주 찾아뵙지 못하였음을 속죄하는 마음가짐으로 자주 찾아 뵙고 있음을 솔직히 고백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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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부모님이 이민 오셔서 계시는 곳 (El Toro Memorial Park)

 

   조부모님은 조국 광복을 전후하여 소천 하셨으니, 이미 60년이 훨씬 지난 옛날 일이기에, 슬퍼하기 보다, 두 분이 생전에 어떤 길을 걸으셨는가를 살펴보면서 우리들도 부끄럼 없이 살아야 하겠다는 것을 다짐하게 되었고, 

   또 이장이라는 의미 보다 조부모님 후손들 모두가 이민와서 살고 있는 미국 땅으로, 뒤늦게 이민해 오신 것으로 생각하면서, 은혜를 내려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2014년 추석을 며칠 앞두고 감사예배를 주례한 바 있는 손자 유한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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